유시(酉時)에 임금(문종)이 강녕전(康寧殿)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39세이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않았는데, 오직 의관(醫官)인 전순의(全循義)·변한산(邊漢山)·최읍(崔浥)만이 날마다 나아와서 안부(安否)를 보살폈지마는, 모두가 범용(凡庸)한 의원(醫員)이므로 병증(病症)을 진찰(診察)할 줄은 알지 못하여,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에게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使臣)에게 연회를 베풀도록까지 하였다.
종기(瘇氣)의 화종(化腫)이 터지므로 전순의(全循義) 등이 은침(銀針)으로써 종기(瘇氣)를 따서 농즙(濃汁)을 두서너 홉쯤 짜내니, 통증(痛症)이 조금 그쳤으므로, 〈그들은〉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3,4일만 기다리면 곧 병환이 완전히 나을 것입니다."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는 날마다 임금의 기거(起居)를 물으니, 다만 대답하기를, "임금의 옥체(玉體)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처지입니다."하였다.
이날 아침에 전순의 등이 나아가서 안부(安否)를 보살피고는, 비로소 임금의 옥체(玉體)가 위태로와 고생하는 줄을 알게 되었다. 세자(世子:단종)는 말하기를, "나는 나이 어려서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의정부의 대신(大臣)들이 빨리 내정(內庭)에 나아가서 임금의 안부(安否)를 묻고, 의정부에서는 모두 근정전(勤政殿)의 뜰에 나아가서 진무(鎭撫)로 하여금 성문(城門)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죄수를 석방하려고 하여 세자(世子)를 통하여 아뢰니, 임금이 벌써 말을 하지 못하면서 다만 대답하기를, "불가(不可)하다."하였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외정(外庭)에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청심원(淸心元)을 올리지 않는가?" 하니, 전순의(全循義)가 비로소 청심원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기가 미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임금이 훙서(薨逝)하였다. 이때 의정부의 대신(大臣)들이 임금의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본부(本府) 에 앉아서 사인(舍人)을 시켜 안부(安否)만 물었을 뿐이고, 한 사람이라도 임금을 뵈옵고 병을 진찰(診察)하기를 청하지는 않고서 범용(凡庸)한 의관(醫官)에게만 맡겨놓고 있었으니, 그때 사람들의 의논이 분개하고 한탄하였다.
의정부에서 병조 판서 민신(閔伸)과 도진무(都鎭撫) 정효전(鄭孝全)·조혜(趙惠)로 하여금 내금위(內禁衛)를 거느리고 함원전 후문(含元殿後門)을 지키고 또 여러 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또 윤암(尹巖)·이완(李梡)·이령(李齡)·최숙손(崔叔孫)으로써 궁성 사면 절제사(宮城四面節制使)로 삼아서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서 주위에 빙 둘러서 경비하고 지키게 하였다. 의정부에서 세종(世宗)의 빈(嬪) 양씨(楊氏)로 하여금 세자(世子)를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옮겨 거처하도록 했으니, 빈(嬪)은 세자(世子)에게 보호하여 기른 은혜가 있는 때문이었다.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고,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정부 참찬(參贊) 허후(許詡)·예조 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삼아서 상사(喪事)를 주관(主管)하게 하였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은 백의(白衣)와 오대(烏帶) 차림으로써 모여서 통곡하고 이내 습전(襲奠)을 설치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街巷]의 소민(小民)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왕(嗣王)이 나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臣民)의 슬퍼함이 세종(世宗)의 상사(喪事)보다도 더하였다.
임금은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무거워서 장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나이가 겨우 10여 세가 되자, 황제(皇帝)의 사신이 왔으므로 세종(世宗)이 채붕(彩棚: 나무를 엮어 비단 장막으로 덮은 것)을 설치하여 맞이하니, 서연관(書筵官)이 임금에게 채붕(彩棚) 앞의 수레를 멈추도록 하고, 영인(伶人)이 다투어 기예(伎藝)를 바쳤으나 임금은 조금도 보시지 아니하였다. 이미 돌아와서는 궁료(宮僚)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에게 채붕(彩棚) 앞에 수레를 멈추도록 했는가?" 하니, 모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서 강론(講論)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두 동작(動作)을 한결같이 법도(法度)에 따라 하였다.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성색(聲色)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居敬] 몸을 수양(修養)하며, 신심(身心)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환하게 살펴서,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논변(論辨)하지 않지마는, 논난(論難)한 데 이르러서는 비록 노사 숙유(老師宿儒)일지라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시선(侍膳)하고 문안(問安)하기를 날로 더욱 신중히 하여,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임금이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또 후원(後苑)에 손수 앵두[櫻桃]를 심어 매우 무성하였는데 익은 철을 기다려 올리니, 세종께서 반드시 이를 맛보고서 기뻐하시기를, "외간(外間)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世子)의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날마다 세종(世宗)의 옆에 모시면서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면서 부지런히 힘쓰면서 그치지 않았으니, 《역경(易經)》과 《예기(禮記)》는 모두 세종께서 가르친 것이었다. 이미 성리(性理)의 글을 통달하고 나서 표현하여 문장을 만들게 되니, 모든 교명(敎命)은 모두 붓을 들고 곧 그 자리에서 써서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일찍이 목척(木尺)에 우연히 쓰기를, "이 자[尺] 처럼 범용(凡庸)한 물건도 사용하여 굽은 것을 바르게 할 수가 있으니, 이로써 천하의 정사가 사정(私情)만 없으면 누군들 복종하지 않겠음을 알 수가 있겠다." 하였으니, 그의 도량이 이와 같았다.
또 조자앙(趙子昻) 의 글씨를 좋아하여 왕우군(王右軍:왕희지) 의 서법(書法)으로써 혼용하여 써서 혹은 등불 아래에서 종이에 임하더라도 정묘(精妙)하여 영묘(靈妙)한 지경에 들어갔으니, 그의 촌간(寸簡)과 척지(隻紙)를 얻은 사람은 천금(千金)처럼 소중하게 여기었다. 과녁을 쏠 적에도 또한 지극히 신묘(神妙)하여 겨냥한 것은 반드시 바로 쏘아 맞혔다.
또 천문(天文)을 잘 보아서 천둥이 모시(某時)에 모방(某方)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말했는데, 뒤에 반드시 맞게 되었다. 세종께서 매양 거둥할 적에는 반드시 천변(天變)을 물었는데, 말하면 반드시 맞는 것이 있었다. 문사(文詞)·초예(草隷) ·역산(曆算)·성운(聲韻)과 백가(百家)의 중기(衆技) 에도 또한 그 신묘(神妙)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자(世子)의 자리에 있은 지 30년에 부왕(父王)을 섬김이 지성(至誠)에서 나왔으니, 매양 진선(進膳)할 때마다 반드시 친히 어주(御廚:수라간)에 서서 매양 음식을 먹을 적엔 먼저 맛을 보고 나서야 올렸으며, 날마다 이를 보통의 일로 삼았었다.
그가 즉위(卽位)해서는 행동은 대체(大體)를 따라 하였다. 임금의 자상(姿相)은 존엄(尊嚴)하고 성용(聲容)은 원화(圓和)하여, 처음에 세자(世子)가 되었을 적에 칙사(勅使) 해수(海壽)와 낭중(郞中) 진경(陳敬)을 객관(客館)에서 보았는데, 이때 나이 겨우 10세 였는데도 자상(姿相)이 백옥(白玉)처럼 부드럽고, 읍양(揖讓)과 보추(步趨)가 예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해수(海壽)와 진경(陳敬)이 서로 더불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해수(海壽)가 임금을 사랑하여 손을 잡고 더불어 이야기하며 친히 안고 문 밖에 나가서 말 타는 것을 보려고 하는데, 임금께서 예절로써 굳이 사양했으나, 억지로 시키므로 그제야 말을 탔다. 해수가 재상(宰相) 이원(李原)과 탁신(卓愼)에게 이르기를, "세자(世子)로 하여금 학문을 좋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후에 내관(內官) 제현(齊賢)과 행인(行人) 유호(劉浩)도 또한 임금을 보고는 탄상(歎賞)하기를,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재질(材質)을 출생시킬 수 있었다." 하면서 이내 글 읽기를 권장하고 술을 적게 마시도록 하였다.
시강(侍講) 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 우리 나라에 왔을 적에 임금께서 바야흐로 등창[背疽]이 막 났기 때문에 안색(顔色)이 그전보다 못했는데도,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은 한 번 보고서 경의(敬意)를 다하고, 물러가 사관(使館)에 돌아가서는 탄미(歎美)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 그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일을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임금[세종]에게 상주(上奏)하여 시행하였다. 서연(書筵)에 납시어 글을 강독(講讀)하는 이외에는 다른 일에 미치지 아니했으며,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참여하여 결정할 적에는 윤번(輪番)으로 참석하여 정사를 보살폈다. 무릇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뢸 때는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지존(至尊:세종)께 아뢰야 할 것이다." 하고는 자기가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아니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30년 동안에 근신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저녁때가 되도록 세종(世宗)을 모시면서 곁을 떠나지 아니했으며, 세종(世宗)께서 노경(老境)에 피로하시게 되자, 나라의 일은 모두 임금에게 결정되었으니 여러 가지의 정무가 대단히 번거롭고 바쁜데도 시약(侍藥)하고 정사를 보살핌을 일찍이 잠시도 폐(廢)하지 아니했으며, 물러나오면 빈우(賓友)와 더불어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면서 하루 동안에 조금도 편안하고 한적(閒適)한 때가 없었으니, 측근의 사람이 일찍이 게으른 용모를 가짐을 볼 수가 없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근사록(近思錄)》과 사서(四書)를 보므로 소득(所得)이 자못 많게 되니 어릴 때의 독서(讀書)와 같지 않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릇 학문은 더욱 강론할수록 더욱 밝아지는 법인데 지금의 배우는 사람들은 책에 있어서 자못 다른 것이 있으니, 경(卿) 등은 나를 위하여 두 가지를 말하여 보라."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남녀(男女)와 음식(飮食)의 욕심은 가장 사람에게 간절한 것인데, 고량(膏粱)의 자제(子弟)들은 이것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이가 많게 된다. 내가 매양 여러 아우들을 보고는 순순(諄諄)히 경계하고 타일렀으나 과연 능히 내 말을 따르는 지는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즉위(卽位)한 이후에는 한결같이 세종(世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허심탄회(虛心怛懷)하게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자기 마음을 기울여 현인(賢人)을 생각하여, 직언(直言)을 구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서 언로(言路)를 열고 승출(陞黜)하는 법을 제정하여 현우(賢愚)를 분별하며,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중시(重視)하며, 왕씨(王氏)의 후손(後孫)을 찾아서 봉(封)했으며, 농사에 힘쓰고 형벌을 근신했으며, 변방을 지키는 군사를 줄이고 급하지 않은 일을 정지시키며,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었다.
항상 스스로 탄식하기를, "어떻게 정사가 까다롭지 않고 형벌이 지나치지 않아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일이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치를 봄이 매우 밝아서 고금(古今)의 일을 환하게 관찰(觀察)하시어 훙서(薨逝)할 때 임해서도 오히려 사유(赦宥)를 아끼셨으니, 그가 사생(死生)의 이치를 통달했음이 지극한 편이었다. 임금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兩宮)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으시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었다.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병환이 났을 적에 사탕(沙糖)을 맛보려고 하였는데, 후일에 어떤 사람이 이를 올리는 이가 있으니, 임금이 이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輝德殿:소헌왕후의 혼전)에 바치었다. 세종(世宗)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위셨었다.
매양 삭망절제(朔望節祭)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3년을 마치도록 외전(外殿)에 거처했으니, 대개 또한 우리 조정[朝家]의 법이었다.
문종 2년(1452)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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